맥주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평생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핏줄은 속이지 못한다고 지금은 어엿한 알중이 되었다. 소주 안주 중에 맛있는 것들이 많아서 소주로 시작했지만 특유의 향을 견딜 수가 없어서 맥주로 전향했고 지금까지 맥덕으로 살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부모님 집에서 회사를 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양에 방을 얻어 나왔다. 내가 벌어서 전기세도 내도 가스비도 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 갓 넘은 나이가 요즘에 비하면 그리 늦은 나이도 아닌 것 같다.

명학역에서 가까운 오피스텔이었는데 요즘같은 오피스텔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거용이긴 했으나 한 채를 샌드위치 판넬 같은 것으로 벽을 쳐서 두 개로 분할한 사무실이었다. 음악을 조금만 크게 틀거나 심지어 방귀를 뀌어도 옆 방에서 들릴만한, 사생활 보호 따위는 전혀 안되는 열악한 공간이었다. 20층이 넘는 건물이었는데 주거용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나를 포함 서너 가구 밖에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야근을 하고 명학역에 내려 오피스텔을 바라보면 불이 켜진 층이 내가 살던 층과 그 위 아래로 한 두개 층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도 무척 낡아서 문이 열리면 단차가 있어 계단 오르듯 올라타야 했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끼익대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공포스러웠다. 내가 사는 층에 내려서 좌우를 보면 깜깜한 복도가 집어 삼킬 듯이 펼쳐져 있었는데 살면서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던 것 같다. 음악을 마음껏 크게 틀어놓고 바닥을 쿵쿵 울리면서 운동을 하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한 여름 장마에 틀어박혀 반지제왕을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싸구려 방이었지만 창문 밖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시티 라이프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상에 젖어 지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지라 부동산 계약도 처음이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전세계약에 대해서 공부를 하긴 했지만 걱정이 많았다. 물건 주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주인과 직접 계약해야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문제는 계약 해지였다.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방을 빼게 되었는데 집주인은 미국에 나가 있고 대리인인 친구가 마무리를 하러 온다고 하길래 나는 다시 원칙을 내세워 무조건 주인과 하겠다고 우겼다. 젊은 혈기에 눌렸는지 모르겠지만 계약을 위해서 집주인은 귀국을 했다.

오피스텔로 들어온 집주인 아저씨는 데이빗 핫셀 호프 풍의 머리 모양을 하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방을 쓱 둘러보더니 자기는 원래 이곳에 바를 설치하고 싶었다는 둥 스몰토크를 시도했다. 어린 나는 계약이라는 목적에만 몰두해서 뻣뻣하게 굴었다. 중개인을 기다리면서 어색한 시간이 길어졌는데 냉장고에 마실 물은 없고 마침 버드와이저 몇 병이 있어 그 분께 권했다. 정오도 되기 전 이른 시간었는데 아저씨는 쿨하게 마실까? 하면서 한 병을 쭉 마셨다. 그러더니 나를 보면서 우리 친구하면 되겠네, 이런 얘기를 했다.

생각해보면 나이차가 못해도 열 살 이상을 되었을 것이고 원칙 운운하면서 뻣뻣하게 구는 젊은 친구가 우습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뜩 긴장해서 날이 서있던 내게 소위 갑질도 하지 않고 서툴게 내민 맥주도 흔쾌히 마시면서 친구하자고 손을 내밀어준 그 아저씨가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맙다.

그 당시 대부분의 친구들이 밀러를 마실 때 나는 버드와이저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