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에 얽힌 추억

김민기 (gomohan@hanmail.net)

중학시절, 즐겨보던 잡지중에 ‘라디오와 모형’이란게 있었다.  ‘도서출판 과학도서’ 라는 곳에서 내던 잡지였는데 일본잡지를 번역해 출판했던 것이지만내용이나 흥미로운 점에선 흠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의외로 이 잡지를 보던 사람들이 과학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번역물의 중요성을 실감케 한다.각설하고, 그 잡지를 보면 만들고 싶어 미치게 하는 것들이 많이 나온다. 가령 비가 오는걸 감지해서 부저를 울리게 하는 것이나, 지금은 흔해빠진 라디오, 무전기, 특히 가끔 실리던 게임기 제작기사…당시 전자부품을 살 수 있는 곳은, 그것도 학생신분으로 대량구매가 아닌 소량을 살 수 있던 소매점이 세운상가에 있었다. ‘학생과학사’, ‘광도전자백화점’ 등등.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세운상가 3층에는 포르노물을 파는 불법적 상점이 즐비했었다. 거기엔 조폭들이 주름잡고 있다가 강매하기 일쑤였고 그런 곳을 피해서 물건을 사러간다는건 어린 나이엔 고통스러울 정도였다.(사고 싶어 미치는게 아니라 그 놈들이 무서웠단 얘기. ^^) 그럼에도 부품을 사서 만드는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기에 공포와 싸우며(?!) 들락거리곤 했던 곳이 세운상가다.나중에 용산전자상가가 생기고부턴 그쪽과는 발을 끊었다.  

두번째 인연은 컴퓨터 게임 때문이다. 세운상가 내부 3층(부품 상들은 외부 3층에 위치)에 게임전문 매장이 여러 곳 있었다. 제대 후 거기에 들락거리면서 무수한 DOS게임을 즐겼는데 정말 주옥 같은 것도 많았다.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모이는 곳인만큼 황당한 일도 많았다.한번은 토요일 오후 회사서류를 갖고 퇴근했는데 그걸 잠깐 놓고 게임을 고르는 사이에 누가 가져가버린 것이다. 얼마나 정신빠진 놈인지 모르겠지만 군대에서 휴가 나왔다가  ‘이것도 사야지, 저것도 사야지, 돈이 모잘라…’ 하며 혼자 열폭하다 가게직원이 ‘아저씨 거에요?’ 하고 물으니 집어 갔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이가 없다. 훗날 악의가 없는걸로 밝혀졌지만 참 지금도 어이가 없다.그 인연으로 그 가게직원과 친구가 되서 지금도 술한잔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또 한가지 어이없는 일. 그 가게는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도 겸했는데 그 당시엔 그런 곳이 대부분이었다. 워드프로세서를 사갔던 놈이(놈이란 표현에 기분나빠하지 말자. 얘기를 듣고 나면 놈이 아니라 새끼라 할지도 모른다.)  ’프로그램이 이상하다’며 교환을 요구했다.

“무엇이 이상한가?”

“먼저 깔아보고 몇 글자 쳐보면 안다.”

마침 가게에 있던 친구와 나는 호기심에 그렇게 해봤다.

“뭐가 이상한가?”

“이걸보라.”

그 놈이 입력한 글자는…’악령에게 명령하여…’였다. -_-;

“이게 뭐가 이상한가?”

“프린트해보면 안다.”

프린트하고 나니,

“보라! [명령하여]라는 구절이 위로 들려있지 않은가!”

워드프로세서에 귀신붙었단 말인가???  (그러고보니 좀 들린 것 같기도… ^^) 그 때 마침 그 가게 사장님이 오셨다.

“돈 돌려드렷!!! 돈받고 그냥가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

“받고 그냥 가세욧! 안팔아욧!!!”

이외에도 어이없고 한심하거나 웃긴 일이 많지만 이젠 다 추억이 되버렸다.추억이 되버린다는건 슬프다. 다시는 그 경험을 할 수 없지 않은가. 토요일 회사 끝나고 게임고르던 그 기쁨. 사온 부품으로 뚝딱거리며 만들던 그 기쁨(특히나 빨리가자, 빨리 돌아오자, 예산초과는 안될까 등등으로 가슴졸이다 마침내 인두를 손에 쥐었을 때의 그 감격!!!) 친구와 그 뒷골목에서 먹던 감자탕, 보쌈, 특히나 요즘처럼 추운 날엔 닭도리탕…이젠 어느 것도 느낄 수 없게 되버렸다. 만감이 교차한다. (기쁜지 슬픈지 모르겠다… 슬픈 쪽이 강하겠지…)

Categories: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