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무기력에 빠져 살았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쉬운 일부터 하나 둘씩 하다 보니 서서히 그 늪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 같다. 오랜 취미였던 사진을 포기하면서 방치했던 필름 카메라 관련 물품들을 정리해서 팔았고 맥주 양조를 다시 해보려고 필요 없는 물건들은 정리하고 좀 더 편하게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무기력에서 빠져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기력이 우울증의 한 증상이라고 치면 우울이라는 것도 거기에 빠져있을 때는 잘 모르듯이 무기력도 그 시작과 끝을 잘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어쨌든 지긋지긋한 무기력에서 빠져나온 것에 고무되어 있던 요즘 갑자의 익숙한 그 느낌이 찾아왔다. 맥주 양조를 위해서 업소용 싱크대 구매했고 그것을 베란다에 설치하려고 궁리하던 중에 이 모든 일이 너무 벅차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내가 가장 못견디는 것이 ‘무엇인가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 인데 그것이 또 폭발한 것이다. 싱크대를 설치하려면 베란다를 정리해야 한다. 베란다를 정리하려고 보니 낚시 용품, 공구 등 온갖 잡동사니를 정리해야 한다. 그것을 정리하려면 수납공간이 부족하다. 필요 없는 물건들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생각이 이런 흐름을 타면서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 내 무기력의 패턴이었다.

방법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일이 진행된다. 물론 생각보다 일이 안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고 의외의 방식으로 일이 풀리는 경우가 많다. 머리 속에서 굴려보는 일은 될 수록 짧게 하고 몸을 움직이면서 임기응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됐다.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당겨서 써버린 것 같다. 일종의 번아웃이 온 것 같은데 템포를 조절해야 할 것 같다.

눈 내리던 역촌동

눈 내리던 역촌동, 2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