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좋아한다. 사진을 열심히 찍을 때는 두 대의 카메라에 컬러와 흑백 필름을 각각 장전하고 렌즈도 표준과 광각 때로는 망원까지 챙겨서 골목 풍경을 담으러 다녔다. 야경을 좋아해서 삼각대와 오래된 아날로그 노출계도 늘 가지고 다녔다. 나이가 들고 체력이 떨어지고 집중력도 떨어지면서 취미를 많이 줄였다. 이젠 필름으로 사진 찍어본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학창시절 용산에 자주 왔다. 전자공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은 용산 전자상가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전자부품이며 계측장비를 구하러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일반 소비자들이 찾는 양판점 말고 업자들이나 학생들이 가는 곳은 전자랜드 지하나 나진상가나 원효상가 같은 곳이었다. 주말이면 소위 덕후들이 미로 같은 건물 통로에 가득했다. 세운상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점심 무렵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시간이 되면 ‘오봉’을 머리에 이고 통로를 누비는 ‘이모’들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순식간에 점심을 배달하고는 빠져나갔는데 그 냄새가 너무 매혹적이라 도대체 이모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밥집을 찾아 다닌 적도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영화를 보러 용산에 왔다. 전자랜드 건물 안에 랜드시네마라는 극장이 있었는데 서울 시내의 극장치고는 지나치게 한산했다. 예매없이 개봉작을 볼 수 있었고 주차도 편했고 영화가 끝나고 집에 가기도 좋았다. 이제 전자랜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퇴락했고 극장도 문을 닫았다. 용산에 다시 관심을 가지고 된 것은 멀리 포항까지 출장을 갔다가 상경했던 어느 날의 인상 때문이다.

당일치기 짧은 출장이었는데도 여독이 상당했다. 이런저런 일들로 심신이 피곤했던 터였다.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고 같이 간 동료와 함께 서울 서부역쪽으로 내려왔다. 그 때 밥을 먹을 만한 식당이 없어서 골목을 따라서 들어간 곳이 청파동이었다. 삽결살을 파는 가게가 있어 들어갔는데 옛날 양옥집을 개조해서 만든 실내는 넓고 쾌적해 보였다. 고기를 주문하고 맥주를 반주 삼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손님들을 관찰해보니 새로 손님이 오면 아는 척을 하고 사장님과도 스스럼 없이 얘기를 주고 받는 것이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 ‘동네’가 살아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두달 전쯤 집에서 홀로 무료했던 나는 용산의 그 골목들이 보고 싶어서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골목을 오래 걸을 생각에 슬링백에 간식도 조금 챙겼다. 서울 서부역에서 하차해서 청파동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가파른 언덕 중간 즈음 카페가 보이길래 잠시 쉬기도 할겸 가게 안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챙겨온 간식을 같이 먹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그것은 민폐일 것 같아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나왔다. 다시 골목을 걷는데 햇살 좋은 곳에 길냥이가 엎드려 쉬고 있길래 가져간 간식 절반을 나누어 주고 나도 옆에 서서 커피와 함께 간식을 먹었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니 사위가 확 트였는데 등 뒤쪽으로 서울역과 남산타워가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아파트 숲이 가로 막고 있었는데 그곳이 요즘 뜨고 있는 만리재 부근인 것 같았다. 오후 4시 정도의 시간, 빛이 참 좋은 시간인데 카메라를 가져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꼭대기에서 골목을 빠져나가니 예상대로 만리재였다. 화려한 아파트 숲을 따라서 큰 길을 잠시 걷다가 다시 골목를 따라 서부역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음악이 들려왔다. 작은 수퍼의 열린 문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동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위화감이 들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곡이라 그 앞에서 한참 음악을 들었다. 나중에 기억난 그 곡의 제목은 Sweet의 ‘Fox on the run’ 이었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이런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장사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몹시 궁금했지만 계단에 가려 안이 잘 보이지 않아 확인하긴 어려웠다. 수퍼를 지나서 평지가 보일 때 쯤 작은 가게 하나가 눈에 띄였다. MALTA 라는 간판만 보면 정체를 알 수 없었는데 ‘낮에는 에스프레소를 팔고 저녁이면 위스키 바로 변신’하는 그런 가게라고 적혀 있었다. 술을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이고 퇴근길 사람들 마주치기도 싫어서 나중에 위스키 마시러 한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사설이 길었다. 오늘 혼술은 하지 말아야지 하다가 문득 청파동이 생각났다. 시계 바늘은 오후 다섯시를 넘아가고 있었다. 서둘러 씻고 옷을 챙겨 입고 지하철에 올랐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시청역 쯤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어갈 작정이었다. 지도를 확인하지 않고 대충 방향만 잡고 걷다보니 만리재 넘어 가는 길에 접어 들었는데 길가에 신기한 술집이 많았다. 요즘 뜨고 있는 곳인지 원래부터 이랬는지 모르겠다. 다만 너무 화려해 보였다. 만리재에서 청파동쪽으로 길을 건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좁은 골목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데 또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음악이 들려 왔다. 예의 그 동네 수퍼 앞이었다. 오래 걸어서 목이 마르기도 했고 오늘은 가게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확인하고 싶어 가게에 들어갔다.

안경잡이 너드나 머리를 염색한 로커 타입의 젊는 친구를 생각했는데 의외로 대학교수 풍의 노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꼬장꼬장 해 보이는 주인이 앉아 있는 계산대 뒤쪽으로 선반이 걸려 있었는데 책이 십여권 정도 꽂혀 있었다. 일본어 원서나 역사서 따위가 얼핏 보였다. 내부를 보니 수퍼는 아니고 철물이나 잡화를 파는 가게였다. 생수를 한 병 사고 방문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하니 주인장의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말에는 소위 식자가 뭍어나왔으나 자신감이 과하게 느껴젔고 온갖 편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60대 이상은 거의 야만인(이 동네 사람들을 지칭)이라 했고, 본인은 일본 여자와 결혼했는데 한국 여자가 세계에서 제일 문제가 많다는 것, 결국 한국은 미래가 어둡다는 말로 마감 됐는데 계속 듣고 있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냄새가 심했다. 조용한 동네에 은거한 노지식인과의 대화를 생각했지만 어그러졌다. 나는 약속을 핑계로 성급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씁쓸한 기분으로 결국 MALTA 앞까지 찾아갔지만 어이없게도 유리창에 폐업 공고가 붙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