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전기점검으로 뜻밖에 일찍 퇴근하게 되었다. 나는 컴퓨터를 가지고 밥을 벌어먹기 때문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할일이 없다. 뭐 그래봤자 여덟시를 조금 지난 시간이고 내일은 직함도 생소한 ‘사업부장’이란 작자가 독려차 방문한다고 10시까지 출근하라고 하는 상황이라 좋을 것도 없는 그런 금요일 저녁이다. 우리가 5일제 근무회사라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어쨌든 뜻밖에 생긴 시간에 술을 아니 마실 수가 없어서 면목동으로 향했다. 면목동에서는 롤로 거사(居士)님이 사진관을 위장한 철학관을 운영하고 계시다. 술병이 낫다는 평계를 묵살하고 무작정 술집으로 모시고 돼지뼈에 붙은 고기를 벗삼아 적당량의 음주를 했다. 아시다시피 면목동은 열악한 동네다.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대충 30분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먼저 거사님을 보내고 터벅터벅 걸어서 지하철 역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언젠가 이곳에서 청량리행 버스를 탄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버스는 오지 않는다. 면목동, 정말 열악하다. 한참을 기다리니 버스 한 대가 들어온다. 집하고 멀어지지만 않는 노선임을 확인하고 무작정 승차했다.

아무래도 마땅한 정류장이 없다. 대충 답십리 쯤에서 내렸다. 여기서도 버스는 마땅한게 없다. 할 수 없이 지하철을 잡아타고 종로3가로 가자고 했다. 아저씨는 따블을 불렀지만 묵살했더니 에어콘을 안틀어준다. 무지덥다. 아니 술마셔서 그런가? 여하튼 그렇게 간신히 연신내 가는 3호선으로 갈아탔다. 그냥 택시 탈걸 그랬나? 돈 아껴서 뭐 할 것도 없는데.

한참을 헤맸더니 술이 다 깨버렸다. 오늘은, 아니 어제는 그래뵈도 금요일 밤이었다. 멀쩡한 정신으로 집에 들어가면 안되는 날이다. 그렇다고 나는 절대 알콜중독자가 아니다. 금요일 밤에 술 좀 마시면 안됩니까? 이전에 말했던 그 동네 술집으로 갔다. 새벽 한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이전에 사장님이 2시까지 영업한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까 헤맬 때 추척추적 내리던 비가 지하철을 내려 술집으로 걸어가는 사이 제법 츄적츄적하게 변했다. 손님은 없었다. 사장님과 사모님과 가족인지 아닌지 모르는 청년한명이 지키고 있었다.

아저씨는 몇번 가지도 않은 나를 단골처럼 반겨주었다. 하긴,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혼자서 일요일 저녁이나 늦은 밤에 와서 술을 마셨으니 기억이 안날 수도 없겠다. 그래도 기분 좋았다. 누구에 기억되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 아닌가.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늘 누군가의 기억 저편 버뮤다 삼작지대 같은 곳에나 서식하는 나로서는 참 반가운 아는체였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직 맥주 한 잔 하고 갈 수 있지요?”

“그럼요. 여기 앉으세요.”

사람 사는 것이 참 비슷하다. 애늙은이같은 소리 정말 하기 싫지만 실상이 그런 것을 어떠하랴. 나는 IT업계 종사자이다. 물론 곧 탈출할 것이다. 아저씨는 IT업계에서 한동안 컨설팅을 했고 내가 3년 정도를 살았던 홍은동 미미 아파트 뒤편의 한 빌라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고 내가 기억하는 구기동의 파전집과 맥주집을 기억하고 있었고 비내리는 저녁에 혼자 술마시러 갈만한 술집 없음이 안따깝다는 것과 그런 술집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와 이런 작은 맥주집에는 호프를 팔면 안되고 병맥주만 고수해야 한다는 것과 한 두가지 간단한 메뉴 ㅡ 여기서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향신료를 사용한 치킨을 판매하는데 ㅡ 만 잘하면 된다는 것과 조명이 적당히 어두워야 한다는 것과 왜 클래식 카메라를 진열해놨다는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과 내가 클래식 카메라를 좋아하는 이유와 LP판을 진영해 놓은 이유와 혼자와서 맥주만 먹고 가도 부담가질 필요없고 자기도 늘 그런다는 것과 차린지 한달이고 그 서빙하던 청년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과 어쩐지 범상치 않던 그 청년도 연신내 술집만 다섯군데를 돌며 알바자리를 찾다가 막 오픈 준비중이던 이 가게가 맘에 들어 무작정 들어와서 일하게 해달라고 해서 채용했다는 것과 그 친구는 뮤지컬 배우라는 것과 아저씨 동생들도 뮤지컬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주 짤게 얘기를 나눴다.

호가든 세병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맞는 몇 명 친구를 불러 같이 마셨으며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내 필를 카메라를 가지고 가야겠다. 모임 때마다 늘 노래를 부르시는 어떤 분은 한 술집만 20년을 다니셨다고 하니 참 까마득하지만 어쨌든 나도 맘에 드는 단골집이 하나 생겼다. 가게를 나서니 비는 여전히 추척추적 내리고 있었다.

폭우, 출근인지 퇴근인지 불분명한  그 때  교보타워 사거리 근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