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셨다. 소 판돈으로 기타를 샀다가 할아버지께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를 가끔 해주셨다. KBS 관현악단인지뭔지 하여간 시험을 치러 가셨는데 수험번호가 하필 1번이라 너무 긴장한 탓에 떨어지셨단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거나음악을 좋아하신 탓에 전축에도 애정이 많으셨는데 기억하기로는 천일(CHUN IL) 이란 상표의 전축이 집에 있었다. 그리고고장나 버린 전축을 가져오셔서 고대기(납땜쟁이들은 인두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로 대충 지지면 곧잘 소리가 나곤 했다. 집에는전선 쪼가리와 콘덴서들과 저항들을 모아놓은 상자가 있었고 고대기에 송진 든 납이 녹으면서 나는 알싸한 냄새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런 영향으로 전자제품 특히 컴퓨터를 좋아했다. 중학교 때부터 종이에 컴퓨터 자판을 그려서 타자 연습을 했고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허접하지만 조그만 게임도 만들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는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수심많던 청년은 몸이 부실했고 통학하기 가까운 학교에 들어갔다. 걸어다녔으니 이보다 가까운 곳은 없었겠지. 나름 공부는 잘했다.입학 장학금도 받았다. 가보고 알았다. 우리나라 대학생들 진짜 먹고 대학생이란 것을. 대충 다녔는데도 졸업이 되었다. 사회에나가기 싫었다. 하필 졸업년도가 98년도였다. 도피처로 대학원엘 들어갔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놀았다. 완전 잘 놀았다. 지도 교수님이 안식년이라 외국에 나가시는 바람에 2년 중에 1년은 주구장창 놀았다. 그리고 졸업해서 선배가 차린 회사에 들어갔다.

벤처회사였는데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 새벽까지 일하고 출출하면 근처 포장마차에 가서 오뎅국물에 말아주는 잔치국수를 먹었다.닭발도 가끔 먹었다. 소주는 필수였다. 그리고는 다시 회사에 들어가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술을 깬 다음 집에 들었갔다. 이런생활을 5년 정도 했다. 그리고 IT 탈출을 외치면서 그 회사를 때쳐치웠다.

하지만 IT 탈출은 쉽지 않았다. 2년정도를 논 것 같다. 실업급여가 바닥나고 청약저축 깨고 현금 서비스를 딱 한번 받을 때까지 놀았다. 대책없이 놀았다. 컴퓨터가지고 책상머리에서 머리만 굴리던 놈이 할 일은 마땅히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미대로 유명한 모 대학에서 강사 노릇도 잠시했다. 요즘은 예술가들도 전자공학이 필요한 분야가 있더란다. 하지만 그것도 한시적인 것이라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다시 들어간 곳은 막장 벤처였다. 총 인원 6명, 그중에서 엔지니어 3명. 3명의 엔지니어 중에서 실제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나 밖에 없었다. 한심했다. 사장은 나름 유력자의 아들이었다. 그걸 믿고 사업을 밀어붙었다. 일주일간 집에도 못가도 회사에서숙식하면서 개고생도 했다. 그러나 나는 수퍼맨이 아니었다. 사장의 인맥덕에 사업권은 따냈으나 제품이 나오질 않아서 회사는망했다.

그리고 다시 IT 탈출을 꿈꾸며 놀았다. 이번에도 2년 정도 놀았다. 역시 답은 없었다. 실업급여떨어지고 적금 다 깨지고 돈이 바닥날 무렵 한 백만원 어치 샀던 주식이 대박나서 두 배가 되는 바람에 몇 달 더 놀았으나그마저도 다 떨어져서 결국은 또 항복했다. 막장벤처에는 신물이 난터라 조금 편한 중견 기업으로 들어갔다.

널널했다.야생에서 놀던 사람이 집 마당으로 들어왔으니 오죽 편하겠는가? 팀원들이 힘들다고 엄살을 부려도 그처럼 쉬운 일이 없었다. 대충일하는 척만 해줘도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어이가 없었다. 대학 입학 이후로는 더이상의 기술 습득을 하지도 않았다. 남들 놀 때개고생하며 습득했던 밑천 가지고 지금 까지 잘먹고 살았다.

그렇게 2년 반 정도 일했다. 가끔 날밤 까는 날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칼퇴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회사를 IT 탈출의 교두보로 삼을 작정이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맨 처음 그 선배한테 연락이 왔다. 그 선배와의 자세한 사정은 생략하기로 한다. 요컨데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이었다.모 대기업에 있는데 팀을 구성하고 있고 내가 필요하단다. 인사권을 가지고 있으니 원하는 조건은 다 맞춰 준다고 했다.

나는 몹시 갈등했다. 여기서도 충분히 편한데. IT는 이제 안할 건데. 그런데 선배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IT 탈출의 희망이보이는 듯도 했다. 나도 참 멍청한 놈이지, 나는 선배에게 세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칼퇴근, 둘째 양산개발 투입 없음,셋째 프로그래밍 업무 하지 않음. 선배는 OK했고 나는 흔쾌히 입사했다.

그리고 지금 완전히 ‘새’ 됐다.

나는, 보통은 일년이 넘게 걸리는 어떤 제품의 양산 개발을 7월 말까지 해야하는 상황이다. 칼퇴근은 물건너 갔고 양산개발에 투입되었으며 죽도룩 싫은 프로그래밍을 죽도록 해야한다. IT 탈출 계획은 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당분간은 죽어라고 일해야 한다. 다 때쳐치우고 싶지만 선배는 나를 이길로 이끌어준 사람이다. 덕분에 지금까지 먹고 살았으니 지금와서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처지다. 하지만 이번 만이다. 이번을 끝으로 기필고 IT를 탈출하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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