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면발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위장만 괜찮다면 라면만 먹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면발이 땡기는데 여의치 않을 때는 아욱국에 국수를 넣어 삶아먹기도 서슴치 않는다. 그만큼 면종류를 좋아한다. 당연히 냉면도 좋아한다. 나는 찬 음식은 거의 좋아하지 않지만 냉면에 있어서만큼은 예외다. 냉면은 당연히 평양냉면이어야 한다. 맛있는 집이 많지만 우선 소개할 집은 서강대 후문에 있는 을밀대이다.

맛이 있는듯 없는듯 심심한 육수와 툭툭 힘없이 끊어지는 메밀 면발을 제대로 즐기려면 우선은 느긋한 마음가짐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 평양냉면 집에 가려면 복잡한 일 대충 마친 햇살 좋은 오후가 좋다. 고양이 기지개 하는 나른한 오후에 대충 늘어놓은 테이블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고향이 이북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들 몇분이 자리에 앉는다. 시끄럽지 않은 음성으로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사이사이 두툼한 면발을 입에 넣고 살짝 힘을 주면 그 찰기 없는 메밀 면발들은 힘없이 투두둑 끊어진다. 그리고 비로소 큼지막한 놋쇠그릇을 들어 육수 한모금을 마신다. 질기기가 고무같은 싸구려 면발을 인상쓰며 끊어먹어야 하는 시중의 냉면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맛과 정취다. 물론 나는 면귀신이기에 그 시중의 싸구려 냉면도 좋아하지만.

사실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을 때는 사기당한줄 알았다. 육수는 심심해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면발은 찰기가 없이 툭툭 끊어져서 도무지 목을 타고 미끄러지는 느낌이 없었다. 자극적인 조미료 맛에 마비된 혓바닥은 싸구려 맛을 오히려 고급맛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혓바닥에 도포된 조미료 백태는 생각보다 두꺼워서 그 집에 다섯번 정도 들락거린 후에야 비로소 그 진미를 조금 알게 되었다. 그 알듯말듯하게 느껴지던 심심한맛이 이제는 어느 맛보다 진하고 깊은 맛으로 느껴진다. 힘없이 끊어지는 면발도 그 육수에는 응당 그 면발일 수 밖에는 없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맛도 맛이거니와 내가 이 집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넉넉함과 느긋함 때문이다. 여름이면 냉면 맛을 보려는 미식가들의 줄이 십여미터가 넘는데도 그 햇살좋은 식당안의 자리는 듬성듬성하다. 시중의 조금 잘나간다 싶은 식당들을 가보면 최대한의 자리를 만들려고 빼곡히 배치하고 합석을 강요하고 미처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짐짝처럼 내몰린다. 하지면 그곳은 넉넉하다. 그래서 쾌적하고 조용히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벽면에는 그 흔한 TV 출연 광고를 한 개도 볼 수 없다. 넉넉한 양도 마음에 든다. 냉면은 대체로 양이 적어서 사리를 추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웬만한 아가씨들은 남길만큼 많이 준다. 남자들도 든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배터지게 먹어보고싶다면 또 방법이 있다. 이것은 나중에 가실 일이 있으면 연락하시라. 알려드리겠다.

원래 냉면은 겨울이 제철이라 한다. 오늘도 냉면이 몹시 땡긴다.^^

2013.1 추가. 먹거리 X File의 불편한 진실. 쩝

http://fivecard.joins.com/1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