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그 속에 내가 있지 않을 때 그저 무의미한 공간에 불과하다.

내가 그 공간속으로 걸어들어 갈 때 비로소 길이 나타난다.

길 앞에 서면 나는 늘 가슴 한 쪽이 아프다.

그것은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숙명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꼭 발로 디디고 있는 땅 위로만 길이 난 것은 아니다.

유년시절, 방학 때면 홀로 시골 외삼촌 댁에 맡겨졌던 그 쓸쓸했던 기억 중심에는,

늦 가을 황폐해진 밭 가운데서 올려다 보았던 기러기들의 비행이 각인되어 있다.

그 기억은 내가 길 앞에 설 때 마다 느끼는 그 막연한 두려움 혹은 그리움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늘의 길도, 사유의 길도 내면의 길도 다 길이다.

그리움 때문에 길을 나섰고 외로움 속에서도 늘 길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晩秋의 시린 하늘을 항해하는 기러기 편대 아래로

까막득히 내려다 보이는 그 길 어딘가에

나는 여전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