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보면 과연 우리나라가 IT 강국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Hand-Held 장비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눈을 한껏 찡그리고 DMB TV를 시청하거나 열을 올리면서 게임에 열중합니다. 이전에는 소위 어얼리 어답터(신제품을 제일먼저 써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작자 주관적 註)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누구나 한 개쯤은 들고 다니는 흔한 장비가 되었습니다. 저는 레이트 어답터로서 남들이 쓰다 버릴려고 하는 것들을 싼 값에 후려쳐서 사용하는 편입니다.

가끔 자동차를 얻어타봐도 우리나라가 IT 강국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네비게이터가 없는 차가 없습니다. 요즘은 DMB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지요. 저 같은 길치에게는 축복같은 발명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이게이터는 차창밖의 풍경을 조악한 칼라의 벡터 그래픽 지도안에 가둬버리는 아주 고약한 물건입니다. 풍경을 감상하는 멋과 낯선 길에서 헤매는 즐거움을 앗아가 버립니다.

음식점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은 이제 음식보다 디카질이라는 속담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식탐이 강한 저는 음식이 나오면 정신놓고 먹기부터 시작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디카를 꺼내듭니다. 이 음식 디카족들은 때로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블로깅이 보편화된 지금 영향력있는 블로거의 촌평 한마디에 한 음식점이 된서리를 맞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촬영금지를 표방한 음식점도 있을라구요.

햇볕 좋은 날 교외에서는 바주카포를 피해다녀야 합니다. 북한이 쏜 미사일은 무섭지 않습니다. 하지만 IT 강국 답게 관광 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요즘에는 한적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숨바꼭질하듯이 찾아간 그 곳에는 어김없이 하얀 원통형 바주카포를 장착한 사수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사수들은 대체로 고급 메이커의 아웃도어 패션으로 몸을 감싸고 단체로 몰려다니면서 지역을 일시에 장악한 다음 무수한 총탄을 날리고서 우르르 철수합니다. 사실 저도 평상복으로 등산복과 등산화를 신고 다닙니다만 그 분들을 만나면 멀찍이 피해다니게 됩니다.

한시간 남짓의 통근 시간동안 저는 눈을 감고 명상합니다. 혹은 명상을 가장하여 잠을 잡니다. 한 때 영어공부라도 해볼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만 금새 포기했습니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아침잠까지 쪼개가며 그 고생을 하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잠이 안오면 가끔 책도 봅니다. 주변이 시끄러우면 mp3를 듣습니다. 이제는 구식이 된 mp3전용 플레이어입니다. 무가지는 보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낡은차를 하나 입양했습니다. 저는 지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지도를 펼쳐놓으면 꼭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어서 좋습니다. 문제는 제가 길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이게이터를 설치하려고 알아보니 대부분의 제품이 너무 큰 화면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DMB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하다나 가장 간단한 길찾기 기능만 가진 작은 기기를 후배한테(어얼리 아답터입니다) 헐값에 매입하여 설치하였습니다. 네비는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시키죠. 그래서 이놈은 목적지 근방에서만 사용하려고 합니다.

제가 가진 몇 안되는 취미가 사진 촬영입니다. 현재 두 대의 필름카메라와 세 개의 수동렌즈를 가지고 있습니다. Pentax MX라는 기종은 약 10년전에 구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전에 Pentax ME Super라는 기종을 영입했습니다. 조리개 우선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수동기기입니다. 필름의 매력은 불편함에 있습니다. 24장을 찍으면 어김없이 필름을 갈아 끼워야 합니다. 현상을 맡기고 스캔이나 인화를 하기까지 기다리는 맛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멋진 사진이 아주 가끔 나옵니다.

제가 집에서 쓰고 있는 PC는 아주 낡은 것입니다. 한 달 전까지도 CRT 모니터를 사용했을 정도니 말 다했죠.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무색합니다. 어찌보면 저는 시류에 뒤쳐지는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이 편하고 나에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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